본문 바로가기

설법이야기

[스크랩] 부처 마음은 분별 대상이 아닌 주체

 

믿고 의지하는 것만으로 무량 번뇌 끊어지고

실천하면 지혜가 나날이 증장, 열반 이를 것

본문: 묻기를, 어떤 것이 제불의 경계라고 이름 합니까? 원하옵건대 말씀하여 주십시오. 답하기를, 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비유(非有)비무(非無)도 취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을 제불의 경계라고 이름 하느니라. 만일 마음이 목석과 같으면 지혜 있음으로써도 알 수 없으며 지혜가 없음으로써도 알 수 없느니라. 불심은 마음으로써 알 수 없으며 법신은 상으로써 볼 수 없느니라. 알아서 이해한 모든 것은 이것이 망상 분별이니라.

해설: 제불의 경계란 부처님의 근본 성품인 ‘참나’를 의미한다. 불성(참나)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비유, 비무도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여 알고 깨닫는 것이 제불보살의 경계이다. 왜냐하면 유와 무, 비유 비무 등은 참나에 비친 허상의 모습일 뿐 참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텅 빈 참나는 알고 이해하는 사량분별로써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언어도단이요 심행처멸이라고 한 것이다.

본문: 이처럼 지어온 갖가지 종류의 이해는 모두 다 자기의 마음이 헤아리고 비교한 것이며 자기 마음의 망상이니라. 제불의 지혜는 사람들에게 설명하여 보여줄 수 없으며, 또한 감추어 숨길 수도 없으며, 또한 선정으로도 측량할 수 없느니라. 이해가 끊어지고 아는 것이 끊어진 것이 제불의 경지라 하느니라.

또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부처의 마음이라 하느니라. 만약 능히 부처의 마음을 믿을 수 있다면 이와 같은 자는 또한 즉시 무량한 항하사 수의 번뇌를 멸하느니라. 만일 능히 마음에 담아 부처님의 지혜를 항상 생각하면 이 같은 사람의 도심은 매일매일 장대해진다.

해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이 모두는 참나에 비친 정보(업식)일 뿐이다. 털끝만큼이라도 자신이 알고 이해하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참나에 비친 업식이지 참나가 아니다. 사량분별로는 미칠 수 없는 것이다.

선정 또한 참나에 비친 마음의 모습이므로 참나를 알 수 없다. 제불의 경계는 이해와 지식을 넘어서 있다. 부처의 마음은 헤아리고 알고 분별하는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다. 이와 같이 믿고 의지하여 하는 것만으로도 무량한 번뇌를 끊고 오랜 세월 생사윤회고를 줄이는 일이다.

■ 34. 제법은 부동하여 고요하다

본문: 묻기를, 어찌하여 여래의 지혜의 해가 저 땅 속에 잠기어 숨는다고 합니까? 답하기를, 있지도 않는 것을 있다고 보면 지혜의 해가 땅 속에 숨는 것이요 형상이 없는 것을 형상으로 보면 역시 그러하느니라. 묻기를, 무엇이 움직임이 없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답하기를, 유에서 유를 얻을 수 없느니라. 유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에서 무를 얻을 수 없느니라. 무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에 즉하여 무심이니 마음은 움직임이 없으며 상에 즉하여 상이 없음이니 형상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부동상이라고 하느니라. 만일 이와 같이 지어나가 증득한 자는 스스로 속아서 미혹된 것이라고 하느니라. 위의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니 이해할 때에는 법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라.

해설: 여래의 지혜의 해가 땅속에 잠기어 숨는다함은 어리석은 중생의 무명을 비유함이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사물의 존재나 형상, 색을 잘 분별할 수 없듯이 중생들이 참나의 지혜의 빛을 잃어버리고서 존재하지 않는 환영을 실체로 여기고 실체하는 참나는 알지 못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는 것이다.

움직임이 없는 모습이란 참나의 모습이니 참나는 비추어 나타날 뿐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여 혹은 여여라고 한다. 움직이고 변하는 것은 참나에 비친 대상일 뿐, 중생이 어리석어 마치 움직이는 듯 느끼는 것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