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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참나를 깨닫는 것이 도이다

법을 안다는 것은 참나를 아는 것

법을 본다는 것은 참나를 보는 것

본문: 묻기를, 무엇이 법계의 실체입니까? 답하기를, 마음 자체가 법계이니라. 이 법계는 실체가 없으며 또한 경계도 없다. 광대하기가 허공과 같아 볼 수 없으니 이를 이름 하여 법계의 실체라 하느니라.

해설: 법계란 욕계, 색계, 무색계를 비롯 유위, 무위, 유위무위법계, 비유위비무위법계, 무장무애법계 등 존재하는 모든 세계를 말하며 이 모든 세계는 따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곧 법계라 하여 일심법계라고 한다. 법계든 공간이든 은하계든 허공이든 모두가 참나에 비친 업식의 모습이다. 스스로 분별해서 각각의 세계라고 이름붙인 파일 속에 현재 이전에 경험을 통해 얻은 정보의 집합체일 뿐이다. 실체하지 않는 허상이요 이름뿐이다.

■ 달마사행론 - 38. 유지와 무지의 차별 문

본문: 묻기를, 무엇이 법을 아는 것입니까? 답하기를, 법이란 느끼는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는 것을 이름 하느니라. 만일, 마음에 지각이 없으면 이 사람은 법을 아는 것이요 법은 식견이 아니므로 법이라고 하느니라.

만일 마음에 지식과 견해가 없으면 법을 보았다고 이름하며 일체법을 지각하지 않으면 법을 안다고 이름하며 일체법을 얻을 수 없음이 법을 얻었다고 이름하며 일체법을 보지 않으면 법을 보았다고 이름하며 일체법을 분별하지 않음이 법을 분별한다고 이름 하느니라. 묻기를, 법이란 견해가 없음을 말할진댄 어찌 지견을 장애하지 않습니까? 답하기를, 아는 것이 없는 것이 바로 무애하게 아는 것이며 견해가 없는 것이 바로 무애하게 보는 것이다.

해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현재 안, 이, 비, 설, 신, 의 육근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나’라는 아상의 바탕에 현재 이전에 경험 기억된 업식으로 비추어 분별하여 느끼고 아는 것을 말하며 이 모든 과정을 참나가 비추는 것이다. 지식과 견해는 이미 경험을 통해 기억된 업식으로 현재 들어오는 정보(업식)를 분별하여 알아차리고 다시 재정립하여 저장하는 것이다.

이 역시 모든 과정이 참나의 비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법을 안다는 것은 참나를 아는 것이요 법을 본다는 것은 참나를 보는 것이다. 지, 각이나 식, 견, 분별, 얻음 등은 참나에 비친 대상이지 참나가 아니다. 지각이 없어 텅 비어 있으므로 지각에 장애가 없고 견해가 없이 공하므로 일체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이다.

■ 달마사행론 - 39. 각과 불각의 차별 문

본문: 묻기를, 법이 지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 부처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답하기를, 법이란 지각할 수 없음을 뜻하며 부처를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지각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법과 깨달음은 같으니 이것은 불의 깨달음이라 하느니라.

만일 정성을 다해 마음의 모습을 살피면 법의 모습을 보는 것이며 면밀히 마음의 처소를 살피면 이것이 적멸처이며 무주처이며 해탈처이며 허공처이며 보리처이니라. 마음 처소는 처소가 없는 처소이니 이것이 법계처이며 도량처이며 법문처이며 허공처이며 선정처이며 무애처이니라. 만일 이와 같이 이해하는 자는 구덩이에 떨어져 빠질 사람이다.

해설: 참나를 깨닫는 것이 도를 깨달음이요, 깨달은 자가 부처요, 깨닫는 방법이 법이다. 삼세제불의 모든 가르침은 참나에서 비춰 본 모든 대상이요 일체 대상에서 참나로 찾아가는 방법이다.

참나가 텅 비어 있으니 공이요, 텅 비어 구함이 없으니 열반이요, 구함이 없으니 생사의 구속에서 벗어나니 해탈이요, 주와 객이 무너지니 무주요 무애이며 모든 지혜의 완성이니 보리처이며 수행의 근본이니 도량처이며 고요함의 근본이니 선정처요 텅 비어 비추어보니 법문처요 지혜처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알음알이와 사량분별로 이해하면 이는 또 다른 업식이요 환영일 뿐이므로 생사를 벗어날 수 없다. 사량분별과 이해의 주체를 찾아보아라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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