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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스크랩] 도는 닦을 것이 없다 생사의 차별심만 버리면 된다

 

다만 물들지(汚染) 않으면 된다

‘생사심’으로 조작함이 물듦이다

본문: 견처(見處)가 투철하고 용처(用處)가 명백하니, 번개 치듯 기봉을 휘두르며 물소 뿔에 달무늬 지듯 하며(結角羅紋) 종횡으로 뒤섞여도 스스로 능히 회전해서 막힘과 걸림이 없어야 한다. 또한 견해를 세우지도 않으며 기틀을 남겨두지도 않은 채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듯 도도해야 한다.

해설: 이 편지는 원오스님이 소주(蘇州)의 곤산(崑山)에 머물던 혜엄(惠嚴)스님에게 보낸 글이다. 깨달은 바가 분명하고 또 깨닫고 난 뒤에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 명백하다면, 상대방이 누가 오든지 간에 자유자재로 걸림 없이 법을 사용하여 이익을 나누어줄 줄 알아야 한다.

법은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고 물소 뿔에 비친 달빛과 같으며 진흙에서 핀 연꽃과 같아서, 삼계가 아무리 불타고 있어도 물드는 바가 없이 적정(寂靜)하다. 일체 중생이 이 본분사를 늘 사용하고 있으므로 따로 세워야 할 법이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또한 머무를 바가 없이 인연 따라 천변만화하면서 나투는 모습이 마치 물결 따라 넘실대거나, 풀이 바람 불면 쓰러졌다가 그치면 다시 일어나는 것과 같이 무애자재하다.

본문: 근원을 깨달아 들어갈 경우 연원에 사무치면 될 뿐 수증(修證)에 관계할 것(回互)이 없으니, 앎도 오히려 용납할 수 없는데 더구나 알지 못하는 경우이겠느냐. 하루 종일 이렇게 얽어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주관과 객관, 나와 남을 간직하지 않으니 불법이 무슨 상관이리요.

해설: 마조(馬祖)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는 닦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물들지 않으면 된다(道不用修 但莫汚染). 무엇이 물들음인가? 생사심(生死心)으로 조작하고 도모하게 되면 모두가 물드는 것이다. 도(道)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이 도다”라고 하였다. 도는 본래 다 드러나 있어서 닦고 증득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학인마다 근기가 달라서 방편을 세워 모습을 보이다 보니, 돈교(頓敎)도 있고 원교(圓敎)도 있으며 또 다른 입장도 천차만별로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본분의 입장에서는 온갖 방편을 싹 쓸어버리고, “도는 닦는 것이 아니다”고 잘라서 말한다. 활줄은 곧고 활대는 둥근 것처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이쪽저쪽을 모두 소화하여 어떤 말에도 걸림이 없이 원융해져야 한다.

황벽스님은 “부처님께서 일체 법을 설하신 것은 일체의 마음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일체의 마음이 없다면 일체 법을 어디에 쓰리오”라고 하였다. 주객이 탈락하고 근본이 늘 눈앞에 분명히 드러나 있으므로, 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새삼 아무리 명약이라도 쓸모가 없는 것처럼 법에 집착할 것이 아니다.

본문: 이 무심(無心) · 무위(無爲) · 무사(無事)의 경계를 어찌 총명하고 영리하고 지혜롭고 분별 있고 지식 많은, 세속의 근본 없는 사람이 헤아릴 수 있으랴.

해설: 진정한 불법은 상대가 끊어진 중도불이의 절대이므로, 취사 간택하는 세속의 사량 분별로는 도저히 측량할 길이 없다. 그래서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멸했다(言語道斷 心行處滅)’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심이니 무위니 무사니 하는 말도 조사선에서는 아직 한 겹이 더 남아있다고 하였다.

아직도 유심(有心)과 유위(有爲)의 흔적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유무(有無)와 단상(斷常)까지 다 초월하여, 모양 그릴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실상(實相)이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선(禪)에서는 보살의 경계마저도 어리석은 모습이 남아있으므로 한 겹을 더 뚫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고양이 본을 놓고 그리고 그리다가 마침내 산 고양이가 튀어나오면, 온갖 언어문자와 내외경계가 다 무너지고 오직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 일만이 역력해지니 비로소 ‘배움을 끊고 일없는 한가한 도인(絶學無爲閑道人)’이 되어 ‘망상을 제거하지도 않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不除妄想不求眞)’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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