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연기법 따라 천차만별 변하지만
근본실상은 본래 모두에게 갖춰져 있다
본문: 한 덩어리 적나라한 마음(田地)을 가지고 공겁(空劫)의 저쪽으로 투철히 벗어나면 위음왕불(威音王佛)도 오히려 손이거니, 하물며 다시 남을 좇아 찾으려 하겠느냐! 조사 이래 본분 작가들은 모두 이러하였다.
해설: 성품을 분명하게 밝히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無始無終)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역대 명안종사들은 모두 근본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여 투철하게 벗어났다. 인연 따라 일어난 허망한 모습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근본자리를 깨닫게 하는 과정에서 믿음과 근기가 약한 공부인에게는 방편문을 시설해서 대자유를 직접 맛보게 하는 자비를 베풀었다.
본문: 저 육조(六祖)스님의 경우, 신주(新州) 땅 일개 땔감장사에 불과하여 눈으로는 글자도 알아볼 수 없었으나, 오조 홍인스님을 한 번 뵙자 가슴을 열고 투철히 벗어버렸다.
해설: 광동성 신주 땅에서 나무장사로 연명하던 육조혜능스님은 어느 날 선비가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아직 점수(漸修)적 입장이 남아있는 돈오(頓悟)였다. 그 후 오조 홍인스님을 찾아갔는데, 오조 스님이 거칠다면서 8개월 동안이나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도록 유도했다.
마침내 오조 스님이 삼경(三更)에 찾아오도록 해서, 다시 한 번 금강경을 설해주는 데서 확철대오 했던 것이다. 이때의 깨달음이야말로 돈오돈수(頓悟頓修)인 것이다.
그리고 오조 스님에게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겠습니까” 하고 말씀드리자, 오조스님은 그대가 장부(丈夫) · 천인사(天人師) · 불(佛)이라고 인정하고 의발을 전했다.
비록 돈오를 했지만 아직 상(相)이 남아있는 수행자라면 점수를 해야 하고, 모양이 없는 보살은 상을 여읜 입장이기에 돈수를 한다. 나아가 깨달을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는 열반의 참다운 실상자리는 돈 · 점을 논할 수 없기에 무오무수(無悟無修)라고 할 수밖에 없다.
본문: 그런 즉 비록 성현이 세상 자취를 묻고 살아도, 요는 방편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이 일은 훌륭하고 어리석음에 관계없이 모두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다.
해설: 육조스님은 의발을 전해 받은 후에 시기하는 무리에 쫓겨 15~16년 동안이나 숨어 지냈다. 드디어 법을 펼 때가 되어 광주 법성사로 나와서 신분을 드러내고 머리를 깎았으며, 조계 보림사로 돌아가서 법좌에 올라 소주 위자사를 비롯한 사부대중에게 “보리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다만 이 마음을 쓰면 곧 성불해 마치리라(菩提自性 本來淸淨 但用此心 直了成佛)”고 사자후를 한 후에 설법을 시작했다.
본문: 이제 이미 참선하는 부류에 들어갔다면 매일같이 그윽한 마음으로 참구해야 하리라. 이 큰 인연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줄 알아야 한다. 오로지 이 일은 몹시 날카로운 근기로 본분사를 걸머지고 더욱 나아가는데 있으니, 백천 번을 단련해서 순금을 만들 듯 나날이 망상을 덜고 도를 늘려야 한다.
해설: 홀연히 한 마음이 일어나서 움직임이 벌어지고 그 벌어진 움직임이 연기법에 따라 천차만별의 각종 모습으로 거듭난다 하더라도, 한 번도 뒤바뀐 적이 없는 근본실상자리는 본래부터 모두에게 갖추어져 있다. 본래면목이라고도 부르는 그 자리는 한 생각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에 관계없이 지금 여기에 몽땅 다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이, 지금 즉시 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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