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가 사라진 우리 마음자리(定)
그 자리서 일어나는 바른 생각(慧)
선종 화엄ㆍ천태종 등 수행 근본
<육조단경>은 선종의 성전이다. 육조 스님은 첫 설법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정혜(定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선종(禪宗)을 정립한 육조 스님의 법문은 정혜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선종뿐만 아니라 화엄종, 천태종 같은 교종과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사마타 등 모든 불교가 정혜를 근본으로 한다. 정혜를 알아야 불교를 안다고 할 수가 있다.
정혜란 무엇인가? 곧 우리 마음을 말한다. 우리 마음에 번뇌가 사라진 자리를 정(定)이라 하고, 그 자리에서 바른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혜(慧)라 한다. 깨달음을 성취하면 분별망상이 완전히 사라져 항상 바른 생각이 나오는 정혜가 된다.
그런데, 이 정혜는 누구나 갖춰져 있다. 부처님이나 중생의 마음도 정혜로 되어 있으나, 중생은 번뇌망상에 집착하여 머물기에 지혜가 나오지 못한다. 중생은 늘상 나다·너다, 선·악, 옳다·그르다는 양변에 집착하여 분별망상에 끄달리며 속박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불교를 공부하여 정혜를 알아 ‘나’라는 존재가 실체가 없고 연기적인 존재이며, 온 우주 만물 또한 그러하니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정이고, 그 정에서 바른 생각이 일어남을 혜라 한다.
부처님이 이것을 깨달아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었고, 육조 스님의 법문도 이것을 근본으로 생사를 해탈하여 영원한 행복에 이르게 한다. 육조 스님이 말하는 ‘정혜(定慧)’도 부처님이 깨친 뒤 5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나는 고행과 쾌락의 양변을 여의고 중도를 깨달았다”고 하신 중도의 다른 이름이다. 정혜와 중도는 이름이 다르나 내용은 같다. 나와 우주 만물의 존재원리가 중도(中道)이고 정혜이다.
남방 상좌부 전통의 불교에서는 정혜를 사마타 위빠사나(samatha vipassanā)로 표현한다. 사마타는 정, 위빠사나는 혜이다. 분별망상이 비워진 자리가 정이고 사마타, 그 자리에서 지혜가 나오는 것이 혜이고 위빠사나다. 이것도 이름만 다르지 원리는 같다. 초기경전의 핵심 키워드인 지관(止觀)이 바로 정혜다. 번뇌망상이 그치면(止) 바른 견해인 지혜(慧)가 나온다. 천태사상의 쌍차쌍조(雙遮雙照), 화엄사상의 이사무애(理事無碍), 적광(寂光)도 정혜의 다른 이름이다. 선종의 살활(殺活)도 <금강경>의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도 바로 정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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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선과 교가 다르고 남방과 북방 불교가 다르다, 위빠사나와 사마타가 다르다고만 본다면 이름과 현상에 집착하여 잘못 본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하나이니, 불교도 ‘둘이 아니라 하나(不二)’다. 모양과 이름은 달라도 본질은 중도이고, 정혜다. 이것이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이고,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정견(正見)이다.
그래서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부처님의 깨달음인 정혜를 바로 알고 해야 한다. 자기 마음이 정혜라는 것을 이해해서 정견을 세우면,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깨달음으로 갈 수 있다. 간화선과 사마타-위빠사나도 이 정혜를 실천하고 체득한다는 점에서 같은 수행법이다. 즉, 간화는 화두 한 생각에 몰입(성성)하여 분별망념을 비워(적적) 성성적적(惺惺寂寂) 삼매로 가는 것이고, 사마타-위빠사나는 호흡에 집중하여 분별망념을 비워 정혜를 체득해 가는 것이니 근본적으로 같다. 간화선과 위빠사나, 어느 하나가 옳고 다른 것은 그르다 하면 불교의 근본인 정혜를 모르는 것이다. 불교는 정혜를 근본으로 한다는 것을 알고 수행을 하면 우리 마음이 지혜와 평화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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