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은 조건에 따라 변해가니
아만은 중생심을 불러 괴로우나
하심은 보살심을 일으켜 즐거워
“어리석은 사람은 재물 모으기에 열중한다. 그리하여 때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재물을 쌓아 놓지만, 하루아침에 수명이 다할 때 재물은 그 몸을 따라 주지 않는다(愚騃之子爲下士 治行求財 或正或邪 積累財寶 一旦命盡 財不隨身).” <생경>의 내용입니다.
재물에 속박당하여 멍에를 지더라도(纏縛其心 故稱欲軛) ‘욕심’을 멈추기 어려운 것은 재물이 생활의 자량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유물을 부처님께서도 인정하셨으며 재가자에게도 재물에 따른 이익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소비와 축적에 있어서 ‘정도(程度)’와 ‘중도(中道)’의 가치가 병립되어 있습니다.
‘중도(양쪽을 아우르면서도 한쪽에 치우치지 않음)’란 가치관으로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자세입니다. 불교에서 심신을 핍박하는 고행을 적극 권장하지 않으며 단멸이나 불멸과 같은 편협한 주장으로 세상을 말하지 않는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한쪽만 보는 사람은 단정적인 행동이나 주장을 할 것입니다.
금전 거래가 이뤄지는 수석(壽石, 관상용 자연석)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석에 이미 정해진 값이란 없습니다. 자연석을 두고 관상용으로 적당하다고 의미를 부여하여 시장논리에 따라 거래가 이뤄졌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돌이 아닌 돈의 가치로 논해지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글에 ‘수명’을 거론한 것은 ‘항상’과 ‘무상’을 동시에 말하는 것으로 그 바탕은 중도적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체인 삶을 살피려는 것이지 재물 하나만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마치 재물만 천시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균형 잡힌 시각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욕심도 이에 준하여 생각하면 과도한 욕망이나 허망한 바람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나은 삶, 즉 고통에서 행복으로 가려는 것마저 탐욕이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에서도 그런 의미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만약 번뇌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알면 세속에서 욕심을 부리더라도 재앙을 보고 만족할 줄 알아 절약하고 검소하게 재물을 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슬기를 얻었기에 욕심 부리는 중에 최상이니라(若得出要慧 行欲住在家 見災患知足 節儉用財物 彼得出欲慧 於行欲最上).” <중아함경> 행욕품 내용입니다.
즐거움으로 여기는 오욕락을 들여다보면 우리들의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을 갈구하는 것을 두고 특이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만족할 만큼 갖기 어려우므로 서로 경쟁하면서 갈등합니다. 그런 와중에 자기중심적 입장에서 타인과 비교하여 ‘더’가 작동하면 그 양상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승자독식의 사고로 각자 도생하는 중생심이 우선하면 자리이타의 가치로 요익중생(饒益衆生, 중생을 이롭게 함)하려는 보살심이 옅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재물이나 명예를 ‘더’ 소유하려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욕망의 세계(欲界)’를 성형합니다. 이것을 자신이 만든 늪에 스스로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문득 들은 이야기 한토막이 생각납니다. “남자가 사치하는 욕망의 끝은 명예다.” 대체적으로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그리고 명예가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존엄이나 품위’라는 사전적 설명보다 ‘권력’의 동의어로 여겨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탐욕을 미화한 명예나 그 이면인 권력 둘 다 피상적인 것으로 ‘부여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높여서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이 생긴다면 불교에서 경계하는 아만에 해당됩니다.
아만이란 남들보다 내가 낫다고 스스로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타인과 비교하여 우월하다 생각하고 지속적인 차별화를 갈망합니다. 이것은 과도한 욕심을 부리는 원인 가운데 하나며 스스로 특별하다고 여길수록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같은 범죄가 반복되는 것은 ‘나는 특별하니까’ 그래서 ‘잡히지 않을 것이야’ 하는 자만도 한몫을 하는 것입니다. 욕심과 아만이 상호 충동질하면서 쾌락과 고통을 번갈아 만들어내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아만에 차 있거나 쾌락의 가변성을 간과하는 자에게 그 본질을 깨우치게 하려고, 즐거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조건(因緣)을 따라 변하는 이치(空)를 말하거나 중도적 가치로 한 곳에 치우치지(極端, 邪執)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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