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에 물든 중생심을 보는 것 아니다
보는 것과 마음, 그래서 분리될 수 없어
법문 : 토종새 뱁새를 본 적이 있는가. 뱁새는 아주 작지만 통통 튀어 다니며 10걸음 가서 모이 한 번 먹고, 100 걸음 가서 한 모금 물마시곤 하는데 뱁새는 초롱에 갇히기를 싫어한다. 초롱에 들어가면 잘 먹어서 기운은 좋아지고 몸집은 커질지 모르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이는 세속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운 날개 짓을 하며 살려고 출가한 우리들의 모습과 같다. 어떻게 하면 자유로운 몸짓을 하며 살 수 있는가를 배울려고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번에 배울 장은 단번에 깨닫는 가르침, 우리의 본성을 깨칠 수 있는 대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본문: 小根之人 聞說此頓敎 猶如大地草木根性自小者 若被大雨一沃 悉皆自倒 不能增長 小根之人 亦復如是 有般若之智 與大智之人 亦無差別 因何聞法卽不悟 緣邪見障重 煩惱根深 猶如大雲 蓋覆於日 不得풍취 日無能現 般若之智 亦無大小 爲一切衆生 自有迷心 外修覓佛 未悟自性
卽是小根人 聞其頓敎 不信外修 但於自心 令自本城 常起正見
煩惱塵勞衆生 當時盡悟 猶如大海納於衆流 小水大水合僞一體
해석: “근기가 작은 사람은 단박에 깨닫는 이 가르침을 들으면, 마치 뿌리가 작은 대지의 초목이 큰 비를 맞고 모두 다 저절로 거꾸러져서 자라지 못함과 같다. 작은 근기의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반야의 지혜가 있는 점은 큰 지혜를 가진 사람과 차별이 없거늘, 무슨 까닭으로 법을 듣고도 바로 깨닫지를 못하는가?
삿된 소견의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능히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반야의 지혜도 또한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이와 같이 근기가 작은 사람이라도 단박에 깨닫는 가르침을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마음에서 자기의 본성으로 하여금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 번뇌·진로의 중생이 모두 다 당장에 깨닫게 되나니, 마치 큰 바다가 모든 물의 흐름을 받아들여서 작은 물과 큰 물이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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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육조단경>은 돈교법(頓敎法)을 드러내는 법문이다. 돈교는 늘 점수(漸修)와 대비돼 설명을 하는데 그러면 돈교는 무엇이고 점수는 무엇인가.
‘돈’(頓)의 문자 뜻은 ‘한꺼번에’라는 의미다. ‘몰록’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한 순간’ ‘한꺼번에’ 이런 말이다. 점수는 점차적으로 닦아 나간다는 뜻이다. 중국의 초기 선종 역사는 달마로부터 시작된다. 달마 이전에도 선서(禪書)와 선사(禪師)가 있었지만 달마를 시원으로 삼는다. 달마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했다. 인심을 바로 가리킨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인심(人心)은 ‘우리의 청정 무구한 본래 물듦이 없이 원만구족하고 공덕이 다 갖춰져 있는 본래 성품’을 말한다. 그래서 직지인심이다. 번뇌에 끄달리고 집착을 일으키는 업식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본성을 바로 가리킨다. 곧게 바로 가리켜서 견성성불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견성(見性), 즉 마음을 본다고 했다. 어떤 마음을 보나. 보는 것은 바로 성품이다. 성품을 바로 보는 것이라서 분리가 안된다. 보는 것과 마음은 그래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분리시킨다면 괴리가 생긴다. 아주 작은 거리라도 틈이 있으면 구조적으로 가야할 방법이 필요하게 되며, 그러면 점수가 된다. 점수는 가야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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