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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수행의 기쁨 공명과 바꾸지 않아

가난하고 배고파도 제왕부름 사양

수행의 기쁨, 공명과 바꾸지 않아

중국 남악산에 사는 나잔이라는 선사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선사를 나잔(懶殘)이라고 불렀는데, 누더기를 걸치고 노쇠해서 비틀비틀 걷는 노인이라는 뜻이다. 나잔은 북종선 3세에 해당한다. 즉 신수 문하에 당시 유명한 화엄학자이자 선사인 보적이 있는데, 나잔은 바로 보적의 제자이다.

당나라 현종(712~756 재위)이 나잔의 덕을 칭송해 관직에 기용할 생각으로 칙사를 보내어 나잔을 장안으로 모셔오라고 하였다. 칙사는 나잔이 머물고 있는 산골을 겨우 찾아가 황제의 말을 고했다. 그런데 나잔은 칙사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감자를 굽더니 평소에 씻지도 않아 침과 콧물이 목덜미 근처까지 드리운 채로 감자를 맛있게 먹었다.

마침 이 때가 한 겨울인데다 너무 초라한 행색의 노승이 감자를 먹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칙사가 물었다.

“스님, 무엇이든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나잔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그래, 내가 부탁을 하나 하지요. 자네가 아까부터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어 햇볕이 들지 않으니 자리 좀 비켜 주시오”

후대에 나잔을 찬탄한 작자미상의 시 한 구절이 있다.

“쇠똥 불 헤치며 감자 구워 먹는 맛, 누가 이 맛을 알까? 왕사니, 국사 따위의 관직이 이 수행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게을러 콧물도 못 닦는 신세이건만 도를 어찌 알겠나, 묻지를 말게.”

중국이나 한국불교사에서 불교가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왕권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특히 수나라 때부터 당대 한역 경전 결집이나 세계문화유산급 석굴도 왕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점을 부정하지도 않거니와 비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왕권의 도움 없이도 민들레처럼 산골에서 묵묵히 수행했던 선사들이 있었기에 불교는 존속할 수 있었다.

선종 4조인 도신(580~651)은 쌍봉산에서 수행하며 산을 내려오지 않았다. 당나라 태종이 도신을 뵙고자 3차례나 입궐할 것을 권했으나 도신은 한사코 거절했다. 화가 난 태종이 4번째 입궐할 것을 권하며 ‘이번에 입궐하지 않으면, 목을 베어오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도 도신은 이에 굴하지 않고 쌍봉산을 벗어나지 않았다.

마조의 제자 가운데 분주무업(760~821)이 있다. 무업과 마조의 재미난 선문답은 다음으로 미루고, 그의 만년 모습을 소개한다. 당시 ‘북에는 무업이 있고, 남에는 염관이 있다’고 할 정도로 무업의 선풍이 널리 알려졌다. 헌종(805~820년 재위)이 무업에게 궁에 들어와 설법해주기를 몇 번이나 청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무업 만년에 목종(820~824년 재위)이 또 다시 신하를 보내어 환궁을 요청하자, 무업이 이런 말을 전했다.

“가 보아야 될 곳은 못 가보지만, 길은 반드시 다르지 않네.”

나잔.도신.무업, 너무 멋진 선사들이 아닌가! 이런 선사들이 존재하기에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어도 내가 승가에 머물러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가난하고 배고파도 어찌 수행의 기쁨을 한낱 공명과 바꿀 수 있겠는가. 민초와 같은 선사들이 있었기에 선(禪)은 면면히 흘러왔고, 흘러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