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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스크랩] 본래 마음자리는 깨달음이란 없다

 

본문: 요즈음 시대에 실다운 데 이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몹시 날카롭게 분발해야만 합니다. 창자와 위를 뒤집어 바꿔버리고, 악한 지견을 취하지 말며 잡독을 먹지 않아서, 한결같이 순일하고 아주 진정묘명(眞淨妙明) 하게 되어, 당장에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밟고 안온한 대해탈의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해설: 일단 당처를 밝혀야만, 정진다운 정진을 할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있다. 그때부터는 미세망념이 일어날 때마다 더욱 날카롭게 반야보검을 휘둘러서 살활자재(殺活自在) 해나가게 된다. 마침내 본래면목과 계합하여 안심입명을 얻게 되면, 본래 청정한 마음에는 무명업식(無明業識)은 물론 반야지혜(般若智慧)조차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미혹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깨달은 사람에게는 미혹은 물론 깨달음도 없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의 당처에는 ‘미혹과 깨달음’이라는 상대적인 분별 그 자체가 이미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본래 마음자리에는 깨달음은 물론 그 어떤 흔적도 있을 수 없다.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이 도달할 수 없는 그 자리를, 할 수 없이 방편으로 ‘무시무종(無始無終)’이나 ‘무생법인(無生法忍)’ 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자리가 분명해질 때, 비로소 본지풍광을 밟고 대해탈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에 눌러앉아서 늠름하게 홀로 높아 바람 한 점 들어가지 않고 물에도 젖지 않습니다. 바른 몸을 그대로 이루어 일상생활 속에 역량이 있으니, 소리를 듣고 사물을 보아도 취하거나 버리려는 마음을 내지 않고 착착 닿는 대로 몸을 벗어날 길이 있습니다.

해설: 분별망상의 상대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상(相)을 여의고 자유롭게 되면, 보신불과 화신불도 이 근본자리에서 일어난 작용일 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텅 비어 있으면서도 성성하게 깨어있는 이 마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도 젖지 않는다. 허공에 불을 지펴도 뜨거워하지 않고, 물을 뿌려도 젖지 않는 것과 같다. 인연 따라 나무 하고 물 긷는 평상심이 그대로 신통묘용이어서, 따로 기특한 도리는 없다. 그러면서도 일상생활 중에서 일체의 형상으로부터 자유로워서, 집착도 없고 망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루 종일 일해도 일한 바가 없고, 평생 동안 설법해도 한 마디도 한 바가 없는 무위행(無爲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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