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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스크랩] 일하고 밥짖고 청소하는 그대로가 선 (禪) 이다

혜능, 나와 부처, 티끌도 실체가 없이

중도와 연기ㆍ무아ㆍ공으로 존재하니

경전만 깨달음의 길이 아님을 알리다

오조사가 신수의 게송으로 한바탕 법석을 치렀으나 방앗간 행자 혜능은 이 일도 모른 채 오로지 일심으로 일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동자가 게송을 외고 지나갔다. 혜능은 그것이 깨달은 게송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마음은 거울과 같으니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와 티끌을 없애라.’ 방앗간에서 일만 해 온 혜능이 보기엔 방아 찧는 데 먼지와 티끌은 피할 수가 없다. 늘 먼지 구덩이에서 일하는 입장에선 그 게송은 현실성이 없었고, 고고하게 학문을 닦는 입장이었다.(여담을 하나 하자면, 중국 공산혁명을 주도한 모택동은 늘 <육조단경>을 가까이 두고 읽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육조 혜능이 나무꾼 노동자 출신으로 도를 통했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도는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에 평등하다.)

혜능은 동자를 불러 무슨 게송인지 물었다. 그러자 동자가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혜능은 그 게송이 있는 조사당 회랑에 가보았다. 글자를 모르는 혜능은 옆 사람에게 게송을 좀 읽어달라 한다. 그러고는 자기도 게송을 하나 지을 테니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그 사람은 “오랑캐가 게송을 짓다니”하고 믿지 않자, 혜능은 “미천한 사람이라도 훌륭한 지혜가 있을 수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어리석을 수가 있습니다”고 말했다. 이 말에 놀라 만약 이 게송으로 인가를 받으면 자기를 먼저 제도해 달라 하고는 써준다.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혜능의 게송에는 신수스님이 있다고 본 깨달음, 밝은 거울, 티끌과 먼지도 실체가 없다는 중도(中道)로 바로잡고, 그 자리인 불성(佛性)은 항상 깨끗하니 어디에 티끌과 먼지가 있느냐 한다. 이 말은 부처도 중생도, 깨달음도 번뇌도 본래 연기로 존재하니 실체가 없는 것이고 무아ㆍ공이다. 실체가 없는 티끌과 먼지이니 털고 닦을 게 본래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이고, 선(禪)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수스님이 나와 티끌, 그리고 부처가 있다고 보아 부지런히 털고 닦아 깨치자 하는 양변의 수행관을 혜능은 부정하고, 나와 부처, 티끌도 실체가 없이 중도연기ㆍ무아ㆍ공으로 존재하니 그대로 완전하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바로 그것이다. 부처, 중생, 불법, 무상정등각도 이름일뿐이다. 깨달을 불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법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디에도 머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이 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아직 내가 있고, 내가 닦아가야 할 부처가 있다면 양변의 편견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이 게송을 보고 오조는 바로 오랑캐 행자의 게송임을 간파하고는 조사당으로 불러 금강경을 읽어주니 말끝에 바로 크게 깨쳤다. 언하대오(言下大悟)다. 오조는 혜능을 인가하고 가사와 발우를 전하여 육조로 삼는다. 오랑캐 행자가 육대 조사가 되는 순간이다. 인류 역사에서 또 하나의 위대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무식한 오랑캐 행자 혜능의 깨달음을 교훈으로 삼아 공부해야 한다. 육조가 깨친 과정을 보면 경전을 보거나 좌선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냥 경전을 들었고 일만 하였다. 그런데도 깨쳐 육대 조사가 되어 조사선(祖師禪)을 정립하였다. 경전과 좌선만이 깨달음의 길이 아니다. 우리 재가자들이 중도의 입장에서 일하고 밥 짓고 청소하는 그대로가 깨달음의 길이고 선(禪)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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