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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정견(正見)사견(邪見) 대하여

말과 행동에 ‘진정성’을 내포한

공익·종교는 세상 향기롭게 해

 

법구경 백유경과 같은 경전

두 권이라도 가까이하면 어떨까

상대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축원은 ‘성불합시다’일 것입니다. 이 말은 서로가 깨달을 수 있는 존재라 믿으며 또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는 발원입니다. 상호신뢰가 없거나 의미를 모른다면 건성으로 하는 말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진정성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특히 공인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값싼 장사치들처럼 “밑지고 팝니다” 식으로 말을 한다면,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것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사회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공익(公益)이라면,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종교(宗敎)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하려면 언행이 허망하거나 구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참선하여 생사를 해탈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말이 성실해야 한다(參禪欲脫生死 發言先要誠實)”고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 선철(先哲, 어질고 사리에 밝은 옛사람)께서도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라’는 불기자심(不欺自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상업에 종사하는 분들이야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지켜야 할 정도(程度)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행위에서 사회 통념적이고 도덕적 규범인 경제윤리로써 상도덕(商道德)입니다. 여러 가르침에서도 그 교리에 근거한 ‘윤리’를 주장합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그러한 도리는 그 가르침이 추구하는 본질을 실현시키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무리 거창하고 우아한 말이더라도 상식적 가치와 동떨어졌거나 또 윤리를 말하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결여됐다면 ‘자기의 허물을 벗지 못하면, 남의 허물을 벗겨 줄 수 없는 것(自罪未脫 他罪不贖)’에도 미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공익이라는 권위로 세탁하고 자본주의로 버무린 속신(俗信) 등을 마치 가르침인 것처럼 혼용해 혹세무민하지 않는지 안팎으로 두루두루 살펴 볼 일입니다. 그래야만 TV의 소비자고발 프로그램처럼 소비자가 생산자와 유통업자의 교묘한 상술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본다면 불자는 정말 행복합니다. 부처님께서 고구정녕(苦口丁寧)하게 정견(正見)과 사견(邪見)을 밝혀 놓은 대장경이 우리 곁에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가치 있게 하려면 먼저 믿음과 함께 교리공부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수행의 지남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처님의 경전에 의거하지 않고 남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이라면, 장님 줄서기가 될 가능성이 농후할 것입니다. 이 말은 맨 앞에 선 사람이 장님인데도 그 뒤의 사람이 앞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그저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장님이 아니므로 앞에 선 사람이 장님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긴 줄이 만들어질 것인데 멀쩡하게 눈 뜬 사람이 앞사람의 뒤만 마구 따르다보면 눈 뜬 사람이 장님을 따라다니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것을 ‘장님 줄서기’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경전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금 제대로 하는지 엉뚱하게 하는지 자신을 어디에 비춰 봐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를 두고 자신을 비춰 본다면 온전히 그 사람을 기준으로 비춰 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한테 비춰봐야 한단 말인가?” 등등 자신을 어디에 비춰 볼 만한 대상을 찾아서 인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라대왕의 업경대(業鏡臺, 전생의 업을 비춰보는 지물)에서도 당당해지려면 더더욱 부처님 경전으로 자신을 비춰 봐야 합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바른 견해는 <법구경> 같은 경전 또 어리석음은 <백유경> 같은 경전 두 권만이라도 먼저 가까이하면 어떨까 합니다. 그 이유는 <백유경>에 ‘재물 때문에 형이라 부른 남자’라는 일부분만을 보더라도 수긍이 갈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좋은 말씀을 가만히 훔쳐다 마치 자기인 것 마냥 떠버리다가 사람들이 그대로 수행해 보라고 하면,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재물 때문에 남을 형이라 부르는 것과 같이 이양(利養)을 위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끌어와 중생을 교화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대로 수행할 수 있겠는가.”

길 위에 남긴 누군가의 발자취에 스쳐가는 인연이지만 또 누군가의 발자국이 더해집니다. 그렇게 발자취에 발자국이 더해져 길이 되듯이 지금 여러분도 그 길 위에 계신 것입니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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