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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바른 불교 수행에 대하여

21세기 한국불교의 승패 여부는

대승불교 가르침을 바르게 믿고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어

다 드러났으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는 모양이 없다고 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가장 크고, 또한 가장 작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분명히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진리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고 체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상인 불상(佛像)이 부처인 줄 잘못 알고 복이나 빌 수밖에 없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불상은 나무나 청동 혹은 흙으로 만든 우상일 뿐이다.

그렇지만 우상을 믿게 만든 데는 까닭이 있다. 불교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처음에는 상(相)을 의지해서 시작하지만, 장차 상을 여읜 차원으로까지 점진적으로 나아가게 해주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 바로 우상인 것이다. 비유하면, 일반적으로 초등학교 수준의 학생들을 바로 중학교로 올라가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과과정을 올바로 소화할 수 없어서 뭐가 뭔지 모르고 더 어리석어진다. 불상 앞에서 절을 많이 하는 것은 마치 초등학교를 다니는 것과 같다. 그러고 나면 업이 많이 순화되어서 중학교 수준을 잘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불상에 대한 경배는 종교를 올바르게 믿게 하는 수단, 즉 방편에 속한다.

실제 부처님은 모양이 없다. 그렇다고 사람들더러 아무 모양도 없는 허공을 믿으라고 한다면 그 말은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초심자에게 “이것이 부처다. 이 불상에게 귀의하고 존경하고 예배하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고 하면 시키는 대로 따라서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사다리를 통해 올라갈 수 있도록 시설해 놓은 것이 방편이다. 비유하면 먼저 은을 들고 가다가 금덩어리를 보게 된다면 은을 버리고 금덩어리를 들고 가게 하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세월동안 불전에 나아가 절을 하고 복을 빌던 불자라면, 이제는 진리에 나아갈 수 있는 눈을 떠서 수준 높은 차원의 불교를 배우고 실천해야 된다. 선지식의 말씀을 잘 귀담아듣고 부처님을 믿는 목적이 단순히 불상을 숭배하는 데 있지 않고, 마음의 눈을 뜨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심안을 열고 번뇌로부터 해탈하여, 지혜로운 눈으로 어리석음을 제도하는 대승보살이 되는 데 불교의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믿음은 회의가 생기지 않고 흔들림이 없게 된다. 이렇듯 불교의 본질에 눈을 돌리지 못한다면, 일상의 일이 잘 되고 못되는 데 따라 자꾸 흔들리고 좌절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불교를 오래 믿은 사람이 더 이상해지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런 분들에게 조금 더 차원이 높은 얘기를 해주면 불교가 아닌 것 같아서 외면하고 만다. 알고 보면 어려운 것이 아닌데, 스스로 회의가 일어나서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절에 오래 다녔다는 신도들이 열심히 신심 내서 남보다 부지런히 일주문을 들어서고는 있지만, 때때로 늦게 들어 왔더라도 바르게 믿고 있는 신도들보다 그 신행하는 모습이 못한 것을 볼 때, 미안하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오래 믿어 와서 습관이 굳어진 신도들에게, “그렇게 믿지 말고 이렇게 믿으십시오” 하고 충고하면, 여태까지 믿어 왔던 미련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쉽게 버리지를 못한다. 이치에 맞으면 어리석은 믿음은 그만 두고 올바르게 믿어야 되는데도, 고집이 있어서 그런지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불자라면 지금부터라도 좀 더 차원 높은 불법에 대해 눈을 뜨는 공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구태의연한 기복신앙으로부터 벗어나서,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진실된 신행생활을 해야만 한다. 21세기 한국불교의 승패는 어떻게 하면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바르게 믿고 수행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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