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법이야기

[스크랩] 사회 윤리와 종교 윤리에 대하여

선악을 다 포용하지만 물들지 않는

한 차원 높은 종교적 가치관, 진리

근본무명 깨트릴 수 있는 반야지혜

간화선 수행 인연으로 찾아내시길

우리는 종교를 믿고 안 믿고에 관계없이 ‘종교윤리’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종교윤리 가치관이 정립되면 종교를 이해하는 안목이 바뀌게 된다. 종교윤리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는 사회를 이해하고 있는 일반적인 ‘사회윤리’ 관념으로 종교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회윤리와 종교윤리는 서로 차원이 다른 것을 모르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회윤리 가치관으로 보다 높은 차원의 종교윤리 가치관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올바른 가치 판단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의식보다 한차원 더 높아져야 하는데, 기존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이 문제다.

일반적으로 사회윤리에서는 선(善)은 진리이고 악(惡)은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 “깨끗한 건 진리이고, 더러운 건 진리가 아니다. 정의는 진리이고, 불의는 진리가 아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틀린 소리는 아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법 상식에도 맞고 교육에서도 일반적인 윤리가치관을 그렇게 세워놓았다. 그렇지만 종교윤리에서는 선도 진리이고 악도 진리다. 진리 그 자체는 언제나 선악을 다 포용하지만 선악에 물들지 않는다. 진리 속에는 선도 존재하고 악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만일 선 속에만 진리가 존재하고 악 속에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진리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진리는 둘로 갈라질 수 없는 것이다. 전체인 진리 속에서는 선도 일부분이고 악도 일부분이다. 천당도 그렇고 지옥도 그렇다. 일체 모든 것들이 다 진리 속에 존재하는 것들이지 진리를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다. 그나마 종교까지는 상식과 지식이 통한다. 그러나 종교에서 말하는 그 이상은 진리를 깨닫는 깊은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그 궁극적인 진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 어렵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비유를 말씀드리겠다.

바다의 깊이는 여태껏 최신과학 장비로 측정한 결과 1만m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넓고 깊은 바다에 밝은 해가 비출 때 이 햇빛이 바다 밑 몇 m까지 비출 수 있을까? 아마 기껏 100m나 200m 정도이고 그 이상은 비추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햇빛이 닿지 못하는 나머지 깊은 곳은 어떤 상태로 있으며 또 어떻게 해야 그 어둠을 밝힐 수 있을까?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다. 깊으면 깊을수록 그 밑은 더 이상 비춰볼 수 없는 칠흑 같은 근본무명(根本無明) 즉 무간지옥(無間地獄)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칠흑 같은 곳을 전깃불같이 확 밝혀 근본무명을 깨트릴 수 있을까? 그것을 타파할 수 있는 힘은 다른 어떤 것이라도 불가능하며, 오직 반야지혜(般若智慧)라야만 가능하다. 지혜의 빛은 태양 광명보다 더 빛나고 밝기 때문에, 칠흑을 깨트릴 수 있는 큰 힘이 나온다.

그 힘이 우리의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무명 속에 뒤덮인 채로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초라한 형색이다. 어둠 속에서 허망한 꿈을 꾸는 것은 비단 이번 생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음 생에서도 또 다른 윤회를 반복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있는 것이다.

다행히 부처님께서 생사를 벗어 던지고 고통의 이 언덕에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저 언덕으로 넘어갈 수 있는 큰길을 제시해 주셨다. 부처님과 그 뒤를 이은 역대 조사들께서 전해주신 지혜광명(智慧光明)이야말로, 번뇌 망상을 물리치고 칠통 같은 근본무명을 깨트릴 수 있는 유일한 큰 힘이다.

그런데 그 지혜의 빛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그 빛을 발현해 어둠을 깨트릴 수 있는 큰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역대 명안종사께서 상근기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도록 발견한 수행법이 간화선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