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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부처님의 대답법

만동자’의 열네 가지 ‘십사무기’ 같은 질문은

열반에 도움은커녕 의혹만 불릴 뿐이기 때문

부처님께서 말 조련사와의 대화 도중에 이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그가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고, 그를 타이르지도 않는다. 이것이 여래가 살생한다는 것이다.”(<잡아함경> 제33권)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이란 부처님이 아무리 간곡하게 일러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없는 사람 취급할 수밖에요. 그것을 가리켜 ‘부처님이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죽인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그만큼 부처님은 언제나 중생을 향하고 있고, 중생의 어떤 질문에도 일일이 상대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중생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법’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확하게 그렇다,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것(定答)입니다. 둘째는, 질문에 대해 뜻을 잘 분별해서 대답하는 것(分別義答)입니다. 셋째는, 되묻는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反問答)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로는, 대답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置答)입니다.

네 번째 방식이 혹시 앞에서 말한 ‘중생을 죽이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질문을 받고 대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답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무관심으로 대한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앞서 만동자가 질문했던 열네 가지 항목(십사무기)에 대해 부처님이 취한 대답법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대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답을 한다?

질문한 사람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지도론> 제26권에 따르면, 첫째, 이런 질문은 도무지 이로운 바가 없기 때문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열반을 얻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의혹만 불릴 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이익이 있는 질문에는 잘 분별해서 대답하지만 이로운 게 전혀 없으면 질문을 그냥 내버려두고 답을 하지 않습니다.

둘째, 여러 사상가나 이론가들은 영원하다는 견해(常見) 아니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견해(斷見 혹은 滅見)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거늘, 그런 줄도 모르고서 있다, 없다에 근거해서 던지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영원하다, 덧없다는 상(相)을 취해서 법문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저 중생들의 병을 다스리기 위해 방편으로 하시는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한다면, 이런 사람은 허물을 짓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부처님이 대답하지 않는 것은 허물이 아닙니다. 태양은 온 세상을 환히 비추지만 높은 것을 낮게 만들거나 낮은 것을 높이지는 못합니다. 그저 드러낼 뿐입니다. 부처님도 이와 같아서 어떤 법도 만들지 않습니다. 있는 법은 있다고 말하고, 없으면 없다고 말할 뿐입니다. 생(生)은 노사(老死)에 인연하고, 나아가 무명(無明)은 온갖 행(諸行)에 인연한다고 설하시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이런 인연법은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건 계시지 않건 언제나 세상에 이어지고 있는 법칙입니다. 부처님들이 세간에 출현하시는 것은 바로 중생에게 이런 법칙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함인 것이지 새삼 어떤 법칙을 만들어내시는 건 아닙니다.

넷째, 항상(常)과 단멸(滅)을 대답하면 이것은 허물입니다. 마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남녀의 아이에 대해 그 생김새를 묻는다면, 이런 질문에는 대답하지 말아야 합니다. 열네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14難)도 이와 똑같습니다. 상멸(常滅)을 바탕에 깔고 던지는 질문에는, 상멸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열네 가지 질문에 부처님은 대답하지 않아도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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