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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우리가 보는 이것이 무엇인가

일반인들은 대개 ‘정신적인 벽’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어

참선은 이 벽을 느끼는 데서 시작

‘심안’을 여는 가장 효과적 수행법

 

불교의 요체인 선(禪)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상식적이고 지식적 차원의 이론적인 근거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직접적인 지혜를 눈뜰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우리 인류는 무던히도 어리석음을 지혜로움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결국 찾아내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발전한 사회모습에서 보듯이 엄청난 질적, 양적 변화를 이룩했다. 그것은 무지를 넘어 ‘무지의 지(無知之知)’를 눈뜬 결과다. 알고 보면 시작도 끝도 없었던, 시작과 끝이 동시인 모습 없는 모습에서 비롯된 물질적 장벽과 정신적 장벽을 깨트릴 수 있는 방법을 우리 인류는 오랜 기간의 노력 끝에 찾아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찾아낸 수행법이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1600년이 흘러 간화선이라는 수행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의 일이다.

간화선 수행법은 조사선의 전통을 이어받아 승속간에 빠르고 쉽게 눈뜰 수 있는 가치근거를 제공했다. 어록에는 임제종 양기파의 오조법연스님과 그 제자인 원오극근 이후로 많은 사대부들이 선(禪)을 의지해서 공부하려는 믿음을 냈고, 다시 그 아래의 대혜종고스님에 이르러서는 간화선 수행을 통해 많은 재가자들이 실제로 눈을 뜬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물질적인 벽은 간단한 도구만 있어도 허물 수 있는데 반해서, 일반인들은 대개 정신적인 벽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간화선 수행은 이 벽을 느끼는 데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벽을 실감할 수 있을까?

“앞에 있는 물건을 무엇이 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으면, 보통 사람들은 눈이 본다거나 마음이 본다고 대답할 것이다. 상식이나 지식으로 말하면 맞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지혜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옳은 말이 아니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있어서 볼 줄 알게 된 것이다. 마음이 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마음’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의 정체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실된 사람이라면 의심이 일어나게 된다.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이 바로 본래면목일 텐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것의 정체를 밝힐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자신의 잘못이 자각되기 때문이다. 밖에 있는 온갖 사물과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그토록 많은 호기심으로 달려들곤 하던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니 이게 웬 전도몽상인가? 이런 근본적인 반성을 통해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자성(自性)을 보고 안심입명하는 것이 간화선 수행인 것이다.

이렇게 선수행을 통해 일상생활을 영위한다면,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저절로 망상이 일어나지 않아서 안팎이 환히 보이고, 순리대로 바른 판단을 하고 상식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게 된다. 인과(因果)도 저절로 몸에 배어있어서, 철두철미한 올바른 가치관에 따라 이미 사리에 맞게끔 움직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면에 힘이 넘치니까, 주변 분들에게도 불법의 인연을 공유하여 모두가 여유롭고 복덕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선과 생활이 하나되는 삶을 살려면 생명의 원리인 불법에 눈떠야 하고, 가장 빠르고 쉬우며 효과적으로 심안(心眼)을 여는 수행법으로 인정되어 내려온 것이 간화선이다.

우리 함께 자각각타(自覺覺他) 하여 불국정토를 이루도록, 간화선 수행을 간곡히 권선하는 바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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