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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스크랩] 중도 [中道]의 담론

조선중기 허목(許穆)과 송시열(宋時烈)은 각기 남인과 서인을 대표하는 이론가였다. 조선시대에 이름 높았던 예송(禮訟) 논쟁의 주역들로, 서로 대립하는 파의 우두머리였기에 역사속의 대표적인 라이벌이었다. 그런데 송시열이 중병에 걸렸을 때 허목의 약 처방을 받은 일화 또한 유명하다.

허목은 의술에 정통하여 당대의 유의(儒醫)로 이름 높았고, 당시 백약이 무효했던 송시열은 그에게 가서 약방문을 받아오도록 아들을 보냈다. 송시열의 아들은 마지못해 허목을 찾아가 약방문을 받아왔는데 그 처방에 비상이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 보십시오, 아버님! 허목이 아버님을 해할 목적으로 비상을 넣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 약방문은 없던 일로 하십시오.” 주변에서는 모두 의심하며 말렸지만 송시열은 그대로 약을 달여 먹었고, 곧 완쾌되었다.

과녁은 정중앙을 맞춰야 적중

야구방망이는 상황에 맞는 배팅이 적중

허목은, 송시열의 병은 이 약을 써야만 나을 텐데 비상까지 섞인 자신의 약방문을 믿지 않을 테니 결국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허목이 정적이기는 하나 적의 병을 이용하여 약으로 해칠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송시열이 완쾌하자 허목은 무릎을 치며 그의 대담성을 찬탄했고, 송시열은 허목의 도량에 감탄했다.

이들 선비는 ‘있을 자리에 있는 것’이 진정한 중도(中道)의 삶임을 보여주었다. 허목은 자신의 전문지식을 한 치의 그릇됨 없이 발휘하였고, 송시열은 병자로서 진솔하게 전문가의 처방을 따랐다. 비록 정적일망정 두 사람은 사사로운 갈등 없이 일을 처리하였으니 참으로 밝고 명쾌하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중도(中道)라는 개념을 물리적 중간치로 곧잘 사용하곤 한다.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중간을 선택하면 가장 공평하고 무사정대하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이를테면 두 친구가 함께 좋은 일을 해서 상금을 받았을 때 공평하게 반으로 나누는 것이 맞다. 그런데 한 친구의 집이 몹시 곤란하다면, 그 상금의 몫이 가난한 친구에게 더 많이 갈수록 최선의 자리에 가까이 가는 셈이다.

중도는 양 극단의 중앙이 아니라, 양 극단을 떠난 자리라고 말한다. 결국 중도는 가장 바른 길(正道)을 일컫는 다른 표현인 셈이다. 과녁처럼 정중앙을 맞춰야 적중(的中)인 것이 있는가하면, 야구방망이처럼 중앙에 맞히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당시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배팅이 적중인 것도 있다.

긴 나무막대의 중도는 정중앙이지만, 나무막대가 시소로 사용될 때는 무게중심을 이루는 곳이 바로 중도의 지점이다. 이처럼 병에 따라 처방이 달라지듯이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한 것이 중도이고, 곧 정도이다.

정치에서도 중도에 ‘주의’를 붙여 중도주의(中道主義)로 칭하면서 좌익과 우익의 중간에서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입장으로 쓰고 있다. 얼마 전 이러한 중도 및 중도주의의 특성에 대해 독특하게 해석한 전문가의 의견이 등장한 바 있다.

그는 중도(中道)와 중용(中庸)을 구별하면서, 중용주의는 남산이 제 위치를 잡은 뒤 변하지 않는 것처럼 한번 세우면 방향을 바꾸지 않고 나가는 입불역방(立不易方)이라 보았다.

나무막대의 중도는 정중앙이나

시소로 사용될 땐 무게중심이 중도의 지점

이에 비해 중도주의는 모든 것을 놓고 화합한다고 하지만 화합의 조건에 불역(不易)과 용(庸)이 빠지고 없다 하였다. 이때의 용(庸)은 ‘바르게 형성된 것을 바뀌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중도는 일의 형편이나 정세에 따라 언제든 가변성이 있기 때문에 중용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에서 잘못 쓰이는 중도의 개념을 비판한 것이겠지만, 가변성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중도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해석이기도 하다.

이웃해 있는 두 절에 각기 동자승이 한 명씩 있었다. 그 중 한 동자승이 매일 아침 마당을 쓸고 있을 때면 항상 시장을 보러 가는 다른 절의 동자승을 만나게 되곤 했다. 어느 날 마당을 쓸고 있던 동자승이 물었다.

“어디 가니?” “발 가는 대로 간다.”

이 대답에 당황한 동자승이 자기 절의 공양주에게 이를 말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내일 아침에도 오늘처럼 물어서 같은 대답을 하거든 이렇게 말하려무나. ‘발이 없다면 어디로 갈꼬?’ 그러면 분명히 대답을 못할 걸.” 다음날 아침, 다시 그 동자승을 만났다.

“어디 가니?” “바람 부는 대로 간다.”

다시 할 말을 잃은 동자승은 공양주에게 달려가 자신의 패배를 하소연하였다. “내일은 ‘바람이 없다면 어디로 갈꼬?’ 하고 물어 보거라.” 다음날, 세 번째로 물었다.

“어디 가니?” “시장에 채소 사러 간다.”

물리적 중간치가 아니라

중심 잃지 않고 최선 따라 움직이는 것

변화로써 변화를 쫓아가는 것은 사후약방문에 불과하다. 고정된 형식이나 언어를 넘어선 본질, 그것을 올바로 알 때 참된 승리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화ㆍ가변성에만 초점을 맞추면 중도가 지닌 참뜻과 어긋나고 만다.

도(道)라면 될 것을 중도(中道)라 한 까닭은 무엇일까. 갑골문을 보면 ‘中’자의 수직선(|)은 깃발의 모양이며, 네모(口)는 동그라미였다고 한다. 깃발을 중심으로 빙 둘러싼 모습을 ‘가운데’라는 뜻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형상은 본질과 변화를 함께 담고 있다.

동그라미의 정중앙에 꽂힌 깃발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 없는 균형과 조화를 뜻한다. 동시에 깃발이기에 바람이 부는 데 따라 나부낀다. 바람이 왼쪽으로 불면 깃발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불면 오른쪽으로 나부끼지만 그 중심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중도란 내가 있을 자리에 온전하게 나로서 있는 것, 그리고 중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는 불교적 가르침이 한자 속에 담겨있는 듯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삼매(三昧)의 신행이 필요한 까닭은 온갖 것들이 서로 기대고 얽혀 있는 사바세계에서 바로 보고 바로 설 수 있는 눈을 가지기 위해서이리라.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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