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내는 단계 함께함 강조
수행이 아상〈我相〉 키울 우려 지적
붓다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그래서 여느 사람들과는 그 마음 씀씀이가 달라야 합니다. 마음이 넓고 또 깊어야 합니다. 그런데 넓고 깊은 마음을 지녔어도 자기 마음이 그렇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대지도론>이 원전으로 삼고 있는 <대품반야경>의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써 반야바라밀 속에 머무니, 버릴 것 없는 법으로써 단(보시)바라밀을 갖추니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과 베푸는 물건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죄와 죄 아님을 얻을 수 없음에 의해 시라(지계)바라밀을 갖추어야 하며, (중략)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음에 의해 반야바라밀을 갖추어야 한다.”
몇 번이나 읽어보지만 애매모호합니다. 사실 반야부 경전을 읽어보면 아리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라는 말인지, 그러지 말라는 말인지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고 다그치면서도, 수행했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열심히 살아와서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다면 “아, 난 이렇게 아주 열심히 살아왔다. 정말 내 자신이 생각해도 기특하다”고 한숨 돌리며 자신을 칭찬할 수도 있건만 그러지 말라고 반야부 경전은 말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두 가지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첫째는, 칭찬하는 순간 “이만큼 했으니 이젠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내기 때문입니다. ‘이만큼 했다’라는 생각이 문제입니다. 자칫하다 ‘이만큼’에 안주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안주하면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둘째는, 자꾸 주변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도 이만큼 했는데 나보다 더 나은 당신은 왜 그 정도밖에 못하는가?”
그래서 나만큼 하지 못한 너는 못 난 사람이고, 너보다 못 났지만 이만큼 한 나는 잘 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어느 사이 일으키고 맙니다. 참으로 지독한 아상(我相)입니다. 수행이 오히려 아상을 키워준 셈이 됩니다.
따라서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을 충실하게 닦아 왔어도 비워내는 단계가 함께 하지 못하면 그는 여느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보통 사람들보다 더 옹졸하고 편협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나는 이만큼 수행했다”는 생각을 해서도 안 되고, 그런 생각이 아주 짧은 순간에라도 일어났다면 일어나기가 무섭게 비워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비워낼 수 있게 해주는 것 이것이 반야입니다.
그래서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의 다섯 바라밀과 반야바라밀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전자와 후자에는 나란히 완성을 뜻하는 ‘바라밀’이란 단어가 붙습니다.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반야바라밀…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그러나 ‘위대하다’라는 뜻의 ‘마하’라는 단어가 붙는 것은 여섯 번째인 반야바라밀뿐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반야바라밀에만 ‘마하’가 붙는 이유를 <대지도론>제18권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온 세상에서 시방삼세 부처님이 가장 크고, 다음으로 보살과 벽지불과 성문의 순서이니, 이 네 대인(大人)은 모두 반야바라밀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크다(마하)’라고 일컫는다. 또한 반야바라밀은 중생들에게 한량없고 변하지 않는 열반이라는 커다란 과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크다(마하)’라고 말한다. 반면 보시 등의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것을 실천한 사람에게 세속의 과보만을 안겨주기 때문에 ‘크다(마하)’라는 말이 붙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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