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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스크랩] 지혜는 내가 없다

마음은 중도·정혜·무념으로 돼 있어

집착과 머무름 비우면 먹구름 걷혀

해가 나오듯이 ‘지혜’가 나오는 것…

육조 스님은 <단경>에서 돈오 법문이 ‘정혜(定慧)’를 근본으로 한다고 강조하셨다. 우리 마음이 바로 정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곧이어 이런 말씀도 하신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예부터 무념(無念)으로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으며, 무주(無住)로써 본(本)을 삼는다.”

앞에서는 정혜를 근본으로 한다 하더니 뒤에서는 ‘무념을 종으로, 무상을 체로, 무주를 본으로’ 하니 좀 혼란스럽다. 하지만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를 이해하여 바른 안목이 섰다면 정혜가 곧 무념이고, 무상, 무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 마음이 본래 중도이고, 정혜, 무념, 무상, 무주로 존재하니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 어째서 그런가?

불교와 선(선)을 공부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무아와 공, 무념, 무상, 무주, 무위이다. 무아와 공을 잘못 이해하면 불교를 허무주의로 오해한다. 중국의 유명한 임어당 같은 석학도 불교를 허무주의로 잘못 알았으니 이 공부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중도를 이해하면 쉽게 회통할 수가 있다.

부처님께서는 ‘나(我)’라는 존재가 실체가 없이 연기로 존재함을 깨쳤다. ‘나’는 지금 이 순간 공기를 호흡하지 못하면 존재할 수 없다. 물과 음식 없이도 그렇다. 그러니 ‘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에 의지한 연기적인 존재이다. 이것이 존재의 실상이다. ‘나’라는 존재가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으니 이것을 연기(緣起) 또는 무아(無我), 공(空)이라 한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도 없으니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하여 중도라 한다. 부처님이 이것을 깨달아 생사를 해탈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성취하였다. 

   
 

우리 존재의 실상이 이러하니, ‘나’라고 할 것이 본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내가 있다’ 생각하고 집착한다. 그래서 내가 더 가져야 하고,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존재 원리에서 보면, 이것은 모두 ‘내가 있다’는 양변에 집착한 망상이다. ‘내가 있다’는 한 면에 집착하는 한 생로병사의 괴로움은 영원히 피할 수가 없다.

부처님이 이것을 깨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친 마음을 중도 또는 정혜, 무념이라 한다. 무념(無念)하니 아무 생각도 없는 것으로 오해한다. 아무 생각 없는 것, 마음을 나무나 바위처럼 하는 것이 공부라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무념이란 ‘없는 생각(無念)’으로 번역하면 더 적확할 듯하다. 육조 스님이 으뜸으로 삼는 무념은 ‘생각이 없다’가 아니라 ‘없는 생각’이다. ‘없는 생각’ 무념이란 생각에서 집착과 머무름을 여읜 것이다.

즉 생각에서 양변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는 생각이 무념이다. 흔히 우리는 어려운 상황을 맞았을 때 ‘마음을 비운다’, ‘내려 놓는다’ 는 말을 많이 한다. 이것도 ‘내가 있다’는 입장에서 양보, 버림, 포기와 같이 해서는 지혜가 될 수 없다. ‘내가 없다’는 중도와 무아의 입장에서 해야 무념, 무상, 무주가 되어 지혜가 나온다.

비유하자면, 먹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오는 것과 같다. 우리 마음에 집착과 머무름이 있으면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과 같다. 그런데 집착과 머무름을 비우면 먹구름이 걷히어 해가 나오듯이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은 본래 중도, 정혜, 무념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 욕심과 화와 어리석은 생각을 일으키면 분별망상의 먹구름이 해를 가로막아 지혜가 나오지 못한다. 지혜롭게 밝게 살려면 집착을 비우고 무념이 되어야 한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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