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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참선만이 유일한 깨달음이 아니다

수행법 무엇이든 본분 유지가 중요

수월스님, 염송수행으로 삼매증득

염불.간경.중생교화 모두 수행가능

사연 없는 무덤이 없듯 스님들마다 출가이전 다양한 직업과 뭇 사연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다양함에는 허드렛일을 하다 출가한 승려도 많은데, 부처님 당시 가장 하층민이었던 분뇨를 나르는 니티(尼提)도 있었고, 머슴살이를 하다 출가한 중국의 구행과 한국의 수월스님이 그 예이다.

수월스님(1855~1928)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를 하였다. 탁발승과 우연한 인연으로 29세에 서산 천장암으로 출가하였다. 수월이 글자를 모르다보니, 간경(看經)보다는 부목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였다. 수월은 법당에서 울리는 천수다라니를 듣고 염하였는데, 나무할 때나 밥 먹을 때, 방아 찧는 일을 할 때도 오로지 천수다라니를 지송하였다. 한번은 얼마나 열심히 염송에 몰두했는지 밥이 타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수월이 다라니 독송을 한지 3년 무렵, 신이한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밤, 방앗간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물이 세차게 물레방아에 떨어지고 있는데 방앗공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지 스님이 놀라서 방앗간으로 뛰어 들어가 보니 물레방아 공이 금방이라도 내려찍을 듯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데 수월은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잠이 들어 있었다. 수월이 일념으로 천수다라니를 염하니, 관음보살의 손이 방앗공이조차 멈추게 하였던 것이리라.

이후 수월은 용맹정진에 들어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천수다라니를 염하였다. 7일째 되는 날 밤, 수월의 몸에서 빛이 얼마나 광열하게 내뿜었던지 아랫마을 사람들이 천장암에 광명이 비추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수월은 이렇게 천수다라니 삼매를 증득한 것이다. 스님은 도를 묻는 승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를 닦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하늘 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 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우든지 간에 어쨌든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 겨. 무엇이든지 한 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해야 하는 겨…”

수월의 상황과 유사한 중국의 구행(具行, ?~1924) 스님이 있다. 구행은 어려서 고아로 자랐고, 머슴살이를 하다 20대 초반에 운남성 축성사로 허운을 찾아왔다. 글자를 모르는 구행은 출가 후 오로지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을 염하였다. 어느 날부터 염불 공덕으로 글을 깨우쳤고,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독송해 전부 암기하였다. 하루 종일 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염불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밤에는 경전을 독송하였다. 또한 남을 위해 옷을 기워 주었으며, 바늘 한 땀마다 아미타불을 염하였다. 허운은 대중에게 구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비록 아미타불 한마디만 외울지라도 열심히 정진하면, 도를 이루는데 충분하다. 만약 자신의 총명함만 믿고 마음속의 염불이 한결같지 않다면 만권의 경전을 외울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구행이 저렇게 빨리 깨달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네.”

구행은 허운에게 좌화(坐化)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그러던 어느 날, 구행은 공양간 뒤편에서 스스로 불을 붙여 화거化去하였다. 사람들에게 곧 발견되었지만 그는 이미 입적한 후였다. 구행은 가부좌한 채로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며, 가사를 걸치고, 왼손에는 경쇠를, 오른손에는 목어를 잡고 있었다. 구행의 손에 있는 목어는 손잡이가 재로 변해있었고, 경쇠의 손잡이도 불에 탔으나 구행의 몸과 가사만은 그대로였다. 구행의 법력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구행의 소신공양 이야기는 당시 운남성 신문에 기사화되었다.

인생의 성공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진실되게 살았느냐로 가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처럼 나는 조계종 승려이지만, 참선만이 탁월한 수행법이요, 해탈할 지름길이라고 보지 않는다. 염불을 하든, 간경을 하든, 중생교화를 하든 수행자 본분을 잊지 않고 여일(如一)하게 수행해 나가는 것, 거기에 진정한 깨달음이 있지 않을까?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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