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법이야기

[스크랩] 우리 본성 본래 물들지 않음 보여준 ‘단경’

본래 구족한 청정한 진여불성으로

부처의 삶 살도록 갖춰져 있음 강조

셋째, 정과 혜가 둘이 아닌 정혜불이사상(定慧不二思想)이다.

<단경>에서, “선지식들이여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다. 정은 바로 혜의 몸이요, 곧 혜는 바로 정의 작용이니, 혜가 나타날 때 정이 혜안에 있고, 또한 정이 나타날 때 혜가 정안에 있다.”

“정과 혜는 등불과 그 빛과 같다.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빛도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니, 이름은 비록 둘이나 몸은 둘이 아니니 정과 혜의 법(法)도 또한 이와 같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정혜불이사상(定慧不二思想)은 바로 연기중도(緣起中道)를 말하는 것이며, 반야삼매를 말하는 것이고, 일행삼매를 말하는 것이다. 정과 혜가 머물러 있지 않고 연기중도로써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서로 통하여 잘 수연(隨緣)할 때 이것을 해탈삼매라고 하며 돈오견성이라고 한다. <단경>에서는 연기중도의 삶을 살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넷째, 무념.무상.무주(無念.無相.無住)의 원만수행(圓滿修行)을 강조하였다.

혜능은 <단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이 내용을 보면, “무념으로써 종(宗)을 삼고, 무상으로써 체(體)를 삼으며, 무주로써 근본을 삼는다”고 큰 뜻을 먼저 밝혀 혜능의 선법(禪法)인 남종 돈오견성법이 초조(初祖)인 달마조사의 정법안장 열반묘심의 조사의(祖師意)에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정견(正見)의 법통을 이었기 때문에 혜능의 법(法)이 바로 달마의 선법임을 밝히고 있다.

혜능은 단경에서 무념이란 한 생각이라도 망념이 없으며, 일체법 일체처 그 어느 곳에서도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는 정념(正念)으로 정의하였다. 앞에서 무념을 종지(宗旨)로 한다고 하여 무념에 집착하여 무념을 버리지 않으면 무념은 유념(有念)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무념법은 생명 누구나 본래 구족하고 있는 청정한 진여불성으로 연기적인 부처의 삶을 살아가도록 본래 그렇게 갖추어져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무주는 사람의 본성(本性)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고 전념(前念) 금념(今念) 후념(後念)이 생각마다 상속하여 끊어짐이 없이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한 생각이라도 일체법에 머무르게 되면 얽매임이라 한다. 머무르지 않으면 연기중도의 삶이라고 한다. 연기중도적 삶이 바로 무주(無住)인 것이다.

다섯째, 물듦이 없이 원만한 닦음(不汚染修)을 진정한 닦음이라 한다. 다만 꿈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꿈을 실체화하지 않는 정견(正見)을 갖춘 연기중도적 삶을 말한다. 단경에서, “자기 성품의 마음자리를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과 밖이 밝게 사무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나니,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바로 돈오견성이다.”

견성하면 이것이 반야바라밀행이니, 반야바라밀행이 물듦이 없이 원만한 닦음(不汚染修)이라 하고 이것을 원수(圓修)라고 한다.

이와 같이 <단경>의 대의(大意)를 개략적으로 요약하니, 모든 생명들에게 불성이 있고 반야의 자연지(自然智)가 구족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면 곧바로 돈오이기에 진여법계엔 무타무자(無他無自)인 참된 진아(眞我)의 세계를 체득하므로 원만한 수행인 보살의 삶으로 회향할 수 밖에 없는 동체대비의 삶이 실행된다. 이것은 본래부처가 부처로써 연기공(緣起空)을 사실대로 알고 사실대로 보고 사실대로 삶을 사는 것을 선(禪)이라고 정의 하는 것이 남종선의 선사상(禪思想)이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