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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이야기

[스크랩] 불성은 생명 속에 서로 유기적인 연기 관계

불성은 생명 속의 그 무엇이 아닌

서로 관계 맺고 의존하는 인연법

그럼 몇 가지 혜능 사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을 하면서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첫째 불성사상이다. 불성(佛性)이란 말은 <열반경> ‘사자후보살품’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의미를 풀어보면 일체 뭇 생명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며, 생명의 본질적인 자성(自性)을 일러 불성이라 한다. 모든 생명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생명 속에 무엇인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 속에 부처의 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 경전에서도, “연기를 알면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본다” 고 했다.

이 말의 뜻은 불성은 바로 연기중도를 말하는 것이다. 붓다의 49년간의 설법은 모두 연기설의 응용이라 할 만큼 연기와 관련된 것이다. 중관철학의 개조 용수는 <중론> 서두 게송에 佛性(연기법)의 작용에 대해서,

“사라지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끊어지지도 않고 이어지지도 않는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라고 하였다.

단경에서 살펴보면 황매에 도착한 혜능이 오조(五祖) 홍인대사를 친견하면서 나눈 문답 중에 유명한 불성무남북(佛性無南北)이라는 선(禪)문답이 있다.

홍인 화상이 혜능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온 자이며 나에게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가?”

혜능이 대답하였다.

“제자는 영남에 사는 신주 백성으로 화상을 찾아 뵌 것은 다른 어떤 것도 구하는 바 없고, 오직 부처가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홍인 화상이 힐책하는 어조로 반문했다.

“너 같은 영남의 야만인이 어찌 감히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혜능이 답하길, “사람에게는 남북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불성에야 어찌 남북의 분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야만인인 저와 화상의 신분은 비록 같이 않습니다만 불성에야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혜능은 불성을 항상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불성(佛性)이란 연기법으로써 서로 상호관계를 맺으며 서로 의존하며 서로 상즉상입하며 공생공멸의 인연법을 벗어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다. 제행이 무상하여 고정된 실체성이 없으므로 무아(無我)라고 한다.

초기경전의 무아사상이 반야사상에서는 공성(空性)으로 전환되고, 후기 대승경전에 들어와서는 공성은 불성(佛性)으로 인격화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선종에 와서는 불성사상은 무심(無心)과 평상심(平常心)의 조사가풍으로 자리 잡는다.

둘째, 유전돈법(唯傳頓法)이다. 오직 돈오법만 전한다는 것이다. 단경에서 오조 홍인대사가 『금강경』을 강설하심에 혜능이 한 번 듣고 말 끝에 문득 깨치니라. 그 밤에 법(法)을 받으니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혜능은 모든 법이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음을 순간 깨닫고 깨침의 경계를 말하기를,

“어찌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 없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움짐임 없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으리오” 라고 읊었다.

홍인 화상은 혜능이 돈오견성 하였음을 아시고 바로 천인사불(天人師佛)이라고 인가를 하셨다. <단경(壇經)>이라는 경제(經題)가 붙게 된 것도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혜능은 “오직 돈오견성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宗)을 부수도다” 라고 하였다.

출처 : 좋은세상함께만들기
글쓴이 : 수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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